인생은 고해인가?
흔히들 인생을 고해라고 한다.
무신론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불안과 번민, 죽음에 대면한 존재라고 했다.
청년기 10여 년을 해결핵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두려움과 고통 속에 살 때 내게도 인생은 고해였다.
그 병으로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던 그 시절, 나는 그 병고 때문에 일찍이 인생에 대한 강한 의무를 품고, 그 해답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그러나 철학도 일반 종교도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며, 죽음과 질병은 왜 있게 된 것인지' 등의 근본적인 물음에 아무 해답을 주지 못했다.
공자는 죽음과 내세에 대한 길을 모른다고 했고, 석가는 죽음을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쳤다.
여기서 먼저 생명과 구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하는 이야기부터 나누자.
불경에는 한 과부의 외아들 청년이 죽는 사건이 나온다.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처럼 여기는 그미는 석가모니에게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석가모니는 아들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며 위로한다.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는 그 미가 계속 애원하자.
"그러면 네가 사는 성에 들어가서 사람이 죽어 나오지 않은 집을 찾아봐라.
그리고 그 집에서 쌀을 얻어 떡을 해 오면, 내가 그 떡을 먹고 네 아들을 살려주마."라고 한다.
빈손으로 돌아온 그미에게 석가는 절망과 체념을 가르쳤다.
"그것 봐라, 죽음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냐."라고.
그런데 성경에는 그보다 더 심각하고 극적인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이 제자 들까 나인 성(도시)을 향해 들어가다가 외아들의 상여를 잡고 몸무리 치면서 통곡하는 한 가부를 만난다.
예수님이 상여 멈추게 한 후 그 시체에 손을 얹고 말씀하시기를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는 일어나라."
하시니 죽었던 자가 깨어 일어난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믿게 되었다.
그래서 죽음의 행렬이, 예수님이 이끄는 환희와 소망에 찬 생명의 행렬에 함세하여 성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대는 이 대조적인 두 사건에서 누가 참 생명의 주권자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소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생명 근원이고 주간자인 하나님이면서 사람으로 오신 분으로 성인 이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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