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의 오랜 이웃이요, 벗이다.
그렇다고 그와 내가 성격이나 환경이나 생활이 공통한 데 있어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극단과 극단 사이에도 애정이 관통할 수 있다는 기적적인 교본의 한 표본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처음 그를 퍽 불행한 존재로 가소롭게 여겼다.
그의 앞에 설 때 슬퍼지고 측은한 마음이 앞을 가리곤 하였다.
오늘 돌이켜 생각건대 나무처럼 행복한 생물은 다시없을 듯한다.
굳음에는 이루 비길 데 없는 바위에도 그리 탐탁치는 못할망정 자양분이 있다 하거늘 어디로 간들 생의 뿌리를 박지 못하며 어디로 간들 생활의 불평이 있을 소냐.
칙칙하면 솔솔 솔바람이 불어오고, 심심하면 새가 와서 노래를 부르다 가고, 촐촐하면 한 줄기 비가 오고, 밤이면 수많은 별들과 오손도손 이야기할 수 있고-
윤동주에게 나무는 오랜 이웃이요 벗입니다.
사실 그는 자신을 나무에 빗대고 있습니다.
'퍽 불행한 존재로 가소롭게 여겼던 것'은 그 자진 일수도 있겠습니다.
측은해 보이던 자신은 나무를 보고 행복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칙칙하면 솔솔 솔바람이 불어오고, 밤이면 수많은 별들과 오손도손 이야기' 하는 나무의 일상은 행복 자체입니다.
신기하게도 성경에 아주 비슷한 문구가 나옵니다.
젊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는 이런 거라며 비유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겨자씨를 뿌렸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마태 13장 31`32절)
겨자씨는 자라도 기껏해야 나물에 불과합니다.
새들이 나무를 쪼아 먹지 않고 그 가지에 깃들이는 것, 나물이 큰 나무가 된다는 것도 비약이지요.
겨자씨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변두리 명동마을 출신 윤동주는 전혀 다른 경성이라는 밭에 뿌려져 새로운 나무로 자랍니다.
윤동주는 자기 자신을 나무로 삼아 위로합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기도 했지요.
윤동주가 나무를 보는 시각은 성경에서 말하는 나무와 비교해 생각을 말합니다.
나무는 세상과 대립하는 명령자가 아닙니다.
세상과 더불어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라는 구절처럼 내 마음이 태연하면 세상도 평안합니다.
나무가 있다/ 김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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